감염 위기 속 친환경 마인드 바탕 대혁신 불가피
선수·지도자·심판활동, 한국 유도 위상 업그레이드
바이전주회장으로 활동하며 지역경제 견인차 역할 톡톡
전영천 (주)다오코리아 대표이사. 오세림 기자
“눈길 함부로 걷지 마라. 네 발자국이 뒤에 오는 이의 이정표가 되리니” 백범 김구가 즐겨 읊조렸다는 시의 한 대목이다.
대한민국 증권가에 화제의 인물로 등장했던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 또한 이 말을 인용해 통합 미래에셋대우 출범을 앞둔 각오를 밝힌 바 있다.
전인미답의 길을 가는 선구자는 그만큼 어려운 거다. 어느 분야에서건 첫 길을 가는 자가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다. 필자가 만나 본 전영천(59)씨가 어쩌면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
장수 산골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전북체육중·고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유도인의 길에 들어선 그는 선수로서, 교단에 선 교육자겸 지도자로서, 특히 심판으로서 엄청난 성과를 일궈냈다. 대개의 경우 그쯤되면 해외에 다니고, 골프장 드나들면서 잘먹고 잘 살면서 만족할 법도 한데 그는 또다시 기업가로 변신, ‘체육환경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유도계의 포청천으로 유명한 그를 만나 그간의 삶의 궤적과 향후 계획을 들어봤다.
△오랜만입니다. 코로나 19가 전세계를 휩쓸면서 모두가 힘들다고 하는데 요즘 근황은 어떻습니까.
“예순 살을 일컬어 이순(耳順)이라고 하는데 이는 천지만물의 이치에 통달하고 듣는 대로 모두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돼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쉬운 말도 알아듣지 못하고 있으니 참 답답하죠(하하~) 살다보면 좋은 때도, 어려운 때도 있는 법인데 요즘 살기 편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죠. 저 역시 힘든 시기를 겪고 있습니다만, 묵묵히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가 강타하지 않는 곳이 없지만 유독 스포츠와 경제 분야가 가장 심한 것 같습니다. 체육인 출신 기업인이기에 남보다 훨씬 코로나 사태를 보는 관점이 다를 듯 합니다.
“올해 초 국내에서 코로나가 처음 발생했을때만 해도 저는 길어봤자 여름이면 다 풀리겠지 생각했는데, 요즘 돌아가는 것을 보면 (백신이나 치료제 개발에 달렸겠지만) 최소 내년말까지는 뚜렷한 돌파구가 없어보입니다. 지금은 체육계 일선 현장에서 한발 물러선 상태에서 기업활동에 전념하고 있는데 주변분들은 이구동성으로 죽겠다고 합니다. 저 역시 더 추운 겨울이 올것으로 보고 ‘마른 수건도 짠다’는 각오로 경영에 임하면서 또 한편으론 향후 가치창출을 할 수 있는 분야에 과감히 투자할 생각입니다.”
△유도 선수와 지도자, 심판으로는 매우 큰 성과를 이루셨는데, 기업인으로선 스스로 어느 정도 점수를 주십니까.
“뭐든 쉬운게 없죠. 하지만 정말 어려운 것은 먹고 사는것과 관련된 경제 활동인것 같습니다. 지도자 시절, 특히 심판을 하면서 참 어렵다고 느꼈는데 기업인은 솔직히 더 어렵네요. 친환경 유도매트로 특허를 얻어 국내는 물론 국제무대에 진출하는 등 뭔가 좀 잘 된다 싶었는데 올림픽이나 각종 국제대회는 연기되고 전국체전을 비롯한 국내대회 또한 취소되고 있으니 말이죠.
그런데 이제 친환경 자재나 미세먼지 감소는 선택이 아닌 필수로 등장했기에 학교나 아파트 등지에 저희가 생산하는 친환경 자재가 폭발적인 수요를 가져올 것으로 확신합니다.”
△시간을 좀 거슬러 올라가 유도인으로서 회고해볼까요
“저는 장수읍이 고향입니다. 전북체고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유도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이후 유도 명문인 용인대와 상무에서 선수생활을 했습니다. 원광대 대학원, 경상대 대학원도 졸업했죠. 전북체고 시절 무릎에 큰 부상을 입은게 화근이 돼 훗날 용인대와 상무에서 국가대표까지 지냈지만 큰 빛을 보지 못했고, 결국 일찍 선수생활을 접고 우석고에서 20년 넘게 교편 생활을 하면서 지도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후 고창군청 감독을 맡아 선수를 길러냈는데요, 우석고에서부터 지도했던 김성민 선수가 도쿄 그랜드슬램 3연패를 하는 걸 지켜봤죠. 유도 심판으로 활동하면서 아시아 인으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유도 경기의 하일라이트인 헤비급 결승전 심판을 맡았습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감격이었죠. 선수로서는 조금 아쉬움이 남지만 코치와 감독 등 지도자로서, 또 심판으로서는 과분한 영광을 입었습니다.”
△유도에 관한 한 종주권을 지닌 일본에서 크게 자존심이 상했을것 같습니다만...
“두말할 나위가 없죠. 자신들이 유도를 전세계에 보급한 선구자로 여기고 있는 일본 유도인들로서는 한국인 심판이 아시아인 최초로 올림픽 헤비급 결승전 무대에 서는 장면은 쉽게 넘길 수 없었을 겁니다. 작은 소망이 있다면 후배 유도인들이 저보다 한걸을 더 나아가길 바랄 뿐입니다. 전북 출신 유도인이라면 더 말할것도 없겠죠.”
△아이디어 하나로 벤처기업을 창업하면서 기업으로 변신했다죠?
“매일 매트위에서 뒹굴며 생활하던 중 일선 학교 현장의 유해물품이 심각하다는 점을 새삼 인식하고 친환경제품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친환경매트는 특히 아파트 등의 층간소음을 차단하는 효과도 매우 컸습니다. 2015년 광주유니버시아드 대회때 유도경기장이 가장 쾌적하고 아름다운 경기장으로 선정된 것을 계기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무엇인지도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일선 학교뿐 아니라 개발도상국가에 유도복이나 유도 매트를 무상으로 지원하는 등 힘 닿는대로 나서고 있습니다.”
△향후 계획도 뚜렷할 것 같습니다.
“생활매트 분야를 별도로 마케팅 법인을 설립하고 아파트를 비롯한 일반 가정에 어울리는 탄성을 갖춘 생활소비재 브랜드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할 생각입니다. 특히 스포츠 매트가 가진 탄성과 안정함을 생활매트로도 널리 쓰일 수 있도록 힘쓰겠습니다. 내후년 전북에서 열리는 아태마스터스 대회를 계기로 도내 경기장 주변이 완벽하게 혁신을 기반으로 한 친환경자재로 탈바꿈할 수 있도록 도내 자치단체의 큰 관심도 기대합니다. 무예 스포츠매트 전문기업을 설립했는데 작금의 안전한 경기 환경에서 한단계 더 올라가 체육문화 발전에 공헌하는 기업으로 키우겠습니다. ”
◇ 전영천 다오코리아 대표는
비인기 종목인 유도의 경우 선수로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않아 사람들 뇌리에서 잊혀지게 마련이다. 축구, 야구 등 극소수 구기종목 스타 몇명을 제외하고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고 하더라도 중고교에서 교사만 돼도 대단하게 여겨지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뜻하지 않은 부상으로 인해 선수로서 대성하지 못했기에 전영천의 삶은 더욱 암울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1987년 유도부가 창단됐던 우석고에서 초대 감독교사를 맡으면서 유도인 전영천의 길은 활짝 열리게 된다. 창단 이듬해부터 전국 4강대열에 팀을 올려놨고, 수없이 많은 전북 출신 유도인을 길러냈기 때문이다. 고창군청 감독을 맡으면서 이미 전국적인 지도자로 성장한 그는 늘 2보전진을 위해 1보후퇴를 하는 등 관용의 리더십을 선보였다. ‘유도계의 포청천’이란 별명을 얻을만큼 모든 외압을 물리치고 공정성 하나를 지켜낸 그는 20년 넘게 크고작은 대회의 심판으로 활동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국제A급대회 최다 심판 기록과 국내는 물론, 아시아에서 유래가 없는 올림픽 헤비급 결승전 심판을 맡는 영광을 누렸다.
바이전주우수업체협의회 회장으로 왕성하게 활동중인 그는 지역에서 생산되는 우수 상품에 대한 홍보와 판로개척 활동을 돕고 있다. 진흙밭에 묻혀있던 선수를 발굴해 세계적인 스타로 키워냈듯 유망 업체들을 스타기업으로 육성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유도 명감독에서 이젠 중소기업 명감독으로 변신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혔다. 이를통해 지역사회에 작은 주춧돌 하나라도 놓겠다는 그의 행보가 더욱 믿음직해 보인다.
/위병기 정치경제 에디터
출처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http://www.jjan.kr/news/articleView.html?idxno=2091637)